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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고/하루 한 문장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by 틈새생각 2025.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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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유튜브 방송을 듣던 중 우연히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의 일부를 들었습니다.

듣는 순간, 마음에 돌맹이 하나가 던져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그것은 이내 큰 파장으로 번져나갔습니다.

시의 이야기는 제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제가 분개해 마지않는 어느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삶의 작은 순간들과 맞닿아 덜그럭 거리는 불편한 감정들을 건드리는 느낌이었어요.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르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十원 때문에 一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一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김수영 시인은, 당시 사회의 부조리와 권력의 억압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무력감을 날카롭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시 속 화자는 큰 문제에는 눈을 감고, 사소한 일에만 분개하는 자신을 솔직하게 성찰합니다. 예를 들어, 설렁탕집 주인이나 야경꾼이 돈 때문에 귀찮게 하는 일에는 화가 나지만, 왕궁의 부패나 월남 파병, 언론의 자유와 같은 큰 문제에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야경꾼은 단순한 직업적 의미를 넘어, 사소하지만 반복적으로 일상을 귀찮게 만드는 존재를 상징합니다. 시인은 이를 통해, 큰 부조리 앞에서는 무력하지만, 작은 불편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는 인간의 모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설렁탕집 주인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사회적 약자에게만 분노를 표출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과 같습니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화자는 자신을 모래, 바람, 먼지, 풀에 비유하며 존재의 미미함을 강조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저 역시 일상의 부조리와 맞닥뜨릴 때 얼마나 비겁하게 회피하는지, 얼마나 옹졸하게 반응하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분노하는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 행동하는 순간과 머뭇거리는 순간 사이에서, 저는 얼마나 솔직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성찰하게 됩니다.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는 것이라도 하고 있는지 되묻게 됩니다.

오늘 이 시를 접한 덕분에, 저는 제 마음 속에 던저진 돌멩이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돌멩이 하나가 아니라, 저를 돌아보고 조금 더 괜찮게 살아가도록 일깨워주는 부싯돌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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